2011/01/20 16:40
               교계 기관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커뮤니케이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박영근 박사(아담재 대표 컨설턴트)



   성경은 같은 씨앗이라도 그 결과는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 100여 년 전 이 땅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 또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사회와 이후로 이어진 우리 역사적 풍토와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2004년 대한민국 기독교 문화'라는 꽃을 제대로 감상하자면 그 뿌리가 자리하고 있는 이 땅의 풍토를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적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은 앞에서 드러난 특성의 뿌리를 찾아보고 그 위에 자리한 우리 기독교 문화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전반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 문화의 아름다운 개화를 위한 몇 가지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I. 우리 문화의 특성


한 사회의 문화를 간략하게 살펴본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란, 문자 그대로, 인류 지식, 신념, 그리고 행위의 총체인 까닭에 그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다양한 원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의 특성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 문화의 특성을 정리하기 위한 준비단계인 까닭에 비교적 간편한 방법을 이용하기로 한다.

네델란드의 인류학자 홉스테드(Hofstede, G.)는 그의 저서 "세계의 문화와 조직" (차재호, 나은영 역, 학지사, 1995)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그 나라 사람들의 의식구조의 특성을 정리하기 위한 4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그 첫째는 '권력의 거리'다. 이는 권력의 불평등성을 사람들이 얼마나 잘 참아내느냐 하는 것이다. 홉스테드에 따르면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권력의 불평등을 잘 받아들인다. 윗사람이 권력을 제멋대로 사용해도 밑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 권력이 세지면 거드름을 피우고 허세를 부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홉스테드는 우리나라를 권력의 거리가 큰, 다시 말해 권위주의가 기승하는 나라로 분류한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계속되어 온 군사독재 기간 동안 많은 국민들이 별 저항 없이, 최소한 암묵적으로나마 따라왔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분류다.

둘째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다. 세계 각국의 문화는 이를 기준으로 양분될 수 있는데 우리 문화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사회다. 집단주의 사회란 개인보다는 집단이 모든 면에서 우선시되는 사회를 말한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우리'를 밝힌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이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 번째 기준은 남성적 문화냐 혹은 여성적 문화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남성과 여성은 자연적 성(性)과는 다른 의미로서, 얼마나 자기주장을 강한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을 뜻한다. 여성적 문화는 태도가 겸손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남성 위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홉스테드의 분류에 따르면 다분히 여성적인 문화로 분류된다. 앞에서 살펴 본 너무도 강한 집단주의적 문화 전통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기준인 '불확실성 회피 정도'는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불확실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얼마나 견디어내나 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것을 잘 참지 못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불확실성 회피 정도가 높은 나라로 분류된다. 이 분류는 앞에서 살펴 본 집단주의와 연결되어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우리 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분류를 기준으로 살펴 본 우리 문화의 특성은 권위적이며, 집단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배타적인 것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II. 한국 문화의 뿌리


        앞 장에서 살펴 본 우리 문화의 성격들의 기원을 찾기 위해선 우선 이들 네 가지 특성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집단주의, 여성적, 그리고 폐쇄적이라는 특

성들 사이에 핵심 되는 것이 있다면 집단주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끼리'라는 집단주의적

성격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향과 겹쳐지면서 더욱 내부적 단결

이 공고히 되고, 그 단결을 더욱 일사불란한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권위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고, 이런 환경 속에서 구성원 개인들은 자기 자신만의 소신을 분명히

밝히고 이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여성적인 성향을 띄게 도는 것으로 연

결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기본적 틀이 되는 집단주의의 기본 단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며, 그 뿌리는 유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

은 잘 알려진 일이다. 유교의 근간이 되는 오륜(五倫)만 보아도, 부자유친(父子有親)으로부터 시

작된다. 이 다음에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붕우유

신(朋友有信)이 이어질 만큼 가족 내에서의 윤리를 그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도 부자간의 윤리에 밀려 그 뒷자리를 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에 나선 장수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고향에 돌아가 상을 치러야 했던 것이 그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부모에 대한 효(孝)와 임금에 대한 충(忠)이 충돌할 경우, 효를 앞세울

정도로 이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부모 자식간의 정은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이다. 굳이 국가에서 강조하고 강

조할 필요가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에 효를 강조한 것

은 순수한 인간의 정을 중시 했다기 보다는 하나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즉 가정에서 효로 기강을 바로 잡아야 나라가 바로 잡힌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교가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서 법치(法治)보다는 덕치(德治) 혹은 예치(禮治)를 강조

했다. 덕치란 외부적인 힘으로 국민들을 통제하기 보다는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는 내적인 통

제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 질서의 확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규범의 내

면화 작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족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자각

한 것은 바로 조선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의도는 가족 질서의 확립을 통해 사회 질서를 잡아

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 조정은 지금 보면 대단히 사사로운 가족간의 일에도 관여하였다. 가령 한

집안에서 양자를 맞아들이는 것도 관리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거나, 효자나 열녀 등을 현향하는

데까지 관여 한 것이 그 예에 속한다. 다시 말해 가족을 통치 기구의 일부로 편입한 것이다. 이

렇게 가족 내에서의 규범을 적극적인 관여로 철저히 교육시켜 내면화시킨 다음, 국가는 곧 가족

의 확대라는 인식으로 연결시키면, 조정에서 국민들을 통치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는 곧 임금이라는 끔찍하게 모셔야 할 어버이를 머리로 하는 엄격한 가부장제의 확대로 인

식시키는 것이다. 집에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효도가 그대로 왕에게 확장된다는 것이 공자의 정

치관이다. 이런 뜻에서 정치학에서는 조선의 국가관을 '가족 국가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장남 혹은 종손에게 불평등할 만큼 특별한 권한이 부여

되었다. 조선시대 장남과 종손을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제를 확고하게 확립하기 위해서 썼던 전

략은 '제사권의 종손 독점'과 '재산 상속권의 종손 우대정책'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에만 해도 제

사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냈고 아들이 없을 떼는 시집간 딸이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들면서 이런 전통은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여성학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왕조사는

사회 전면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정도가 점차 강화되는 과정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여성들

이 누릴 수 있었던 제사권과 재산 상속권은 중기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박탈된다. 그리고 남자에

대한 철저한 종속은 강화도어 갔고 더 나아가 이런 태도는 미화되기 까지 했다. 이렇게 여성을

배제하고 나면 그 다음은 남자들 가운데에서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조선조에서는 많은 권한이

불평등하게 장남에게만 몰리게 만들었다. 이는 임금을 정점으로 모든 권력이 꼭대기에 집중되

는 체제와 완전한 닮은꼴이다. 결국 문중의 권리는 하늘로부터 종손이 받았다는 소위 '宗權 神

授說'을 확립시켜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왔다는 '王權 神授說'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

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지만 다리는 땅을 딛고 있듯이, 하늘에서 오는 초월적인

권위도 중요하지만 땅으로부터 오는 현실적인 힘도 중요한 법이다. 즉 경제력의 힘을 말하는 것

이다. 이를 위해 조선조에는 재산 상속 제도를 종손에게 유리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권위에 힘

을 보태주었다. 조선 초에는 딸을 포함하여 모든 자식들에게 비교적 균등하게 재산이 상속되었

다. '분재기(分財記)'라는 기록을 보면, 여성은 시집가면서도 자기 몫의 재산을 가져갈 수 있었

고, 죽을 때는 마음대로 상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엽 이후에 여성들은 시집갈 때 아무

재산도 가져갈 수 없었다. 이렇게 조선은 공자의 고향인 중국보다 훨씬 철저한 유교국가로 세워

졌고 이후 500년 동안 계속 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에 확실하게 뿌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조선조는 유교 가운데서도 비교적 실용적인 양명학은 멀리하

고 철저한 위계질서와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주자학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

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묵자(墨子)의 가르침을 혐오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 문화의 뿌리가 유교에 있고 유교는 가족의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국가 통치의 근간

을 삼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면, 앞에서 살펴 본 우리 문화의 네 가지 특성들이 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III. 한국 기독교 문화의 특성과 그 뿌리


        이제 앞에서 살펴본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특성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 문화

의 특성을 다시 한번 홉스테드가 제시한 네 가지 기준 중심으로 차례대로 살펴보자. 첫째, ‘권력

의 거리‘라는 기준에 따르면 한국 문화는 다분히 권위적인 문화로 분류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

기독교 문화는 과연 대한민국 전반적인 문화에 비해 더 권위적인가 혹은 덜 권위적인가?  정확

한 데이터가 없어 확신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개인

적인 느낌으로는 한국 기독교의 문화가 결코 한국 전반의 문화보다 덜 권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권위가 가정에서의 부모 혹은 국가에서의 실권자의

권위보다 오히려 높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이라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목회자가 갖는 권위의 원천을 하나님으로 설정했을 때 목회자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반발

하는 신도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 맞서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한 순간에 '믿음이 없

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종권신수설(宗權 神授說)이나 왕권신수설(王權 神授說)과 같은

맥락에서 목권신수설(牧權 神授說)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목회자도 평신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선 똑 같이 어리석은 양에 불과하다는 생각보다는, 목회자는 어리석은 양떼를

거느리는 목자라는 주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된다. 

         평신도와 목회자 사이에 이렇게 높은 벽은 곧 한국교회에서 권력의 거리가 심히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목회자가 하는 일에는 특별한 자신의 이익과 상치되지 않는 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금기에 속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형교회 목회자의 목회 세습이나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춘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목회자 지망생의 숫자는 줄지 않는 것도 목회

자가 갖는 초법적인 권력과 연관이 있다 생각된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집단주의적인가 혹은 개인주의적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전형적으로 무엇보다 ‘우리’를 앞세우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뚜

렷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만큼 강한 한국 기독교의 개교회주의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단이나 교계가 연합하는 사업이나 행사는 겉치레로 그

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기독교의 극심한 개 교회주의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부작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라는 집단 내에선 이성적 판단이 그 힘을 잃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결속을

해치지 않는 한 우리 안에 속한 구성원들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다. 같은 사람이 밖에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우리 집단 안에서 내적 규율만 잘 지킨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다. 교회법 뿐만 아

니라 실정법에도 저촉되는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에 대한 지지를 그치지 않는 비이성

적인 행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집단 내에서는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지기

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여’하며 대강 넘어가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습관이 교회내에서는

‘은혜롭게’라는 말로 화려한 변신을 해낸 것이다.

        은혜와 함께 우리 교회를 지탱하는 힘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사이의 끈끈한 인

간적 유대관계다. 새 신자 등록에서부터 구역모임을 비롯한 이중, 삼중의 튼튼한 끈으로 얽어

매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완벽한 우리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렇게 우리에

편입된 사람들끼리는 따뜻한 정이 흐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따뜻한 정이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

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교회나 교단이 아무리 큰 어려움을 당해도 잘 돌아보지 않는 것은

우리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세의 징조가운데 무정(無情)하게 된다는 표현이 연상되는 대목이

다.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분명히 개인의 개성이나 인권이 존중되기 어렵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이 힘을 얻게 되는 조직이 바로 집단주의라는 점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은

혜롭게’라는 표현으로 대강 대강 넘어가는 우리 교회의 회의는 바로 한국 교회가 지극히 집단주

의적일 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이에 따라 행동하기 어려운 여성적 문화를 지니

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남을 의식해야 한다. 남의 생각이 어

떤지 빨리 알아채서 맞추어나가는 노력은 이런 조직에서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기술이다. 이를

갖추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는 경우 그 집단에서 소외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빙빙 돌려 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집단에서는 눈치와 체면이 발달하게 된다. 눈치나 체면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한 우리 교회조직에서 눈치는 곧 ‘아첨’으로 그리고

체면은 ‘허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불확실성 회피 정도라는 기준으로 한국 기독교 문화를 살펴보면, 한국교회는

자신과 다른 불확실성의 회피 정도가 전반적인 한국사회보다 높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

국교회의 문화는 지극히 자기 교회 중심적인 동시에 배타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끼리’라는 배타

적 의식이 강한 조직은 필연적으로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조선말 대원군이 주창한 쇄국정

책과 북한이 고집한 ‘우리식 사회주의’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살아 있는 조

직이란 밖으로 열려 있어 다른 조직과 교섭하는 가운데 외부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혼자서 존재할 수는 없다. 폐쇄는 곧 죽음 혹은 파

멸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후퇴하는 요즘의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불확실성 회피 정도가 높은 조직일수록 우리와 남을 가르는 편가르기에 익숙하게 된다.

한국개신교의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극심한 교단 분열이 그 증거다. 이런 조직일수록 자신

만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나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 누구라도 남이 될

수밖에 없다. 약한 자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장애인이니 혼혈아는 교회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심지어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한국교회에 이율배반적인 현실

은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은 남이라는 극심한 배타적 폐쇄주의로만 이해될 수 있다. 나와 남을 나

누는 성향이 극도에 이르면 이분법적 사고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지경에 이런 조직에서는 양극

단만 존재할 뿐 중간이 위치할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협상과 타협을 통한 융통성은

곧 변질이라는 이름으로 타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요즘 우리 교계가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에

서 방황하는 가운데 중도적인 의견을 가진 다수의 성도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현실도 불확실

성 회피 정도가 높은 우리 교회문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한국 기독교 문화의 특성은 전반적인 한국사회 문화의 특성과 거의 완

전히 일치할 뿐 아니라, 그 정도는 오히려 더 심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 문화의

뿌리 또한 한국사회 전반적인 문화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유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유교 가

운데서도 배타성이 강한 주자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찰이 사실이라면

유교의 토양에서 과연 기독교 문화가 싹트고 꽃 피울 수 있을까 하는 강한 의문에 맞닥트리게

된다. 

         


              IV. 한국 교회 문화를 위한 제언

 

         이 장에서는 문화의 네 가지 특성을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 문화가 제대로 꽃피기 위한 새

로운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1) 문화의 힘은 특별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널리 알려지니 갈브레이드(1983) 교수는 세상의 권력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는 불복종하는 상대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는 공권력

(condign power)이고, 둘째는 재화를 해당하는 보상을 약속하는 보상적 권력(compensatory

power)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건화된(conditioned) 권력이다. 이 세 종류의 권력을 국제

적인 관계에 적용해보면, 공권력은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의미하

고, 보상적 권력은 수령한 재화에 상품이나 서비스로 보상하는 경제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조건화된 권력은 다름 아닌 문화의 힘을 말한다.

        조건화된 권력이란 용어는 파브로프(Pavlov)의 조건반응(conditional response) 실험을

연상시킨다. 즉 개에게 음식 (무조건 자극)을 줄 때마다 종을 울리면 (조작된 조건 자극), 나중에

는 음식을 보면 침을 흘리듯 (무조건 반응) 종소리만 들어도 개는 침을 흘린다는 (조건반응) 것

이다. 전 세계를 뒤덮은 정보통신망을 통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엄청난 양의 양상, 음향,

그리고 문자 정보들은 개에게 주어지는 음식과 같다. 그러나 이 음식에는 영상과 음향, 그리고

문자 정보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과 참께 제작자의 문화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문화에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중독단계에 이르게 된다

는 점에서, 조건화된 권력은 곧 문화의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문화력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필요한

투자와 그 효과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력과 무기를 투여

하여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치르게 되는 손실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고는 패전

국이나 식민지로부터 땅이나 값싼 원료 등을 전리품으로 챙기게 된다. 두 번째 경제력의 승리를

위해선 값싼 원료와 뛰어난 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품질 대비 가격 경쟁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후진국의 재화를 끌어내게 된다. 반면 문화적 권력의 경쟁력은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

에서 판가름 나게 된다. 물론 이 아이디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문화산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이 추자를 걷어 들일 수 있는 효과는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손쉬운 예로, ‘쥬라기 공원’이른 영화 한편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제작 3사의 일년 소득

을 걷어 들였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만 국한된 피상적인

분석이다. 수출된 자동차들은 모두 소비자의 소유로 넘어갔지만, ‘쥬라기 공원’의 소유권은 여전

히 제작자에게 남아 있다. 또한 첫 번째 개봉에서 큰 화제를 모아 명작의 대열에 올라 선 만큼

이미 재상영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여러 차례 재 상영 될 것이다. 이는 이

미 폐차되어 버렸을 우리가 수출한 자동차의 운명과는 확연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

기에서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를 통해 관람자의 머리 속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발한 아이

디어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굉장한 나라’라는 인식이 심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놓친다면, 이는 문화적 권력이 갖는 심대한 영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한

번 깊이 인상 지워진 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뒤를 잇는 미국 문화와 상품의 소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효과의 성격이다. 군사력은 본질상 강제성을 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효과의 지속기간은 승전국 군대가 주둔하는 기간으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경제력

은 높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군사력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그 효과의 지

속 기간도 길다. 그러나 문화적 권력과는 비교할 수 없다. 장기간에 걸친 조작력과 설득력을 바

탕으로 하는 문화적 힘은,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소비자가 스스로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자발성

이 강하다.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얻어낸 정보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의 효과는 장기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효과를 받아들이는 쪽의 반응이다. 공권력의 행사는

무력을 동원한 강제성을 띄게 되는 만큼, 그 과정에서 상대의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침

략 당한 약소국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저항운동과 자주국방 노력 등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경제력의 경우에 있어서도, 강도는 덜하지만 경제적인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후진국의 끊임없는

노력에 맞설 수밖에 없다. 선진기술을 따라잡아 자립 경제를 이루려는 치열한 경쟁을 ‘소리 없

는 전쟁’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화의 힘의 경우는 영향을 받는 대부분의 소

비자가 자신이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세련된 조작과 연출에 노출된 결과이다. 따라서 문화적 침략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공권력이나 경제력의 경우처럼 피부에 닿도록 실감하고 대비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 사실이다. 

         문화가 이렇게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한국교회는 문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노

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의 힘은 길고 큰 시각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짧은 시간 내에 현실적인 소득에만 집착한다면 문화에 대한 투자는 어리석

은 일일 수밖에 없다. 당장 예배출석 인원의 증가만을 목표로 하는 근시안적 시각에서 벗어나

멀리 높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 좌석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신성 모독적이고 다

분히 외설적인 세속문화와의 전쟁에서 기독교 문화는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문화는 물처럼 흐른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인 까닭에 흐르는 물처럼 계속 흐르고 변

화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여 있는 물이 썩는 것처럼 변화하지 않는 문화 또한 그 생명력을

읽고 만다.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 문화 또한 급변하는 현실에 맞추어 매번 새롭게 변신해야

한다.  이런 변신에 있어 명심해야 할 점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문화 또한 높은 곳

에서 낮은 데로 흐르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수준이다. 숫자는 문제

되지 않는다. 아무리 수와 양이 많다고 해도 흐르는 방향은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약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될 때, 기독교는 영혼 구원의 복음이었을 뿐 아

니라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만큼 높은 수준의 문화이기도 했다. 새로운 의학이나 교

육 등과 같은 가시적인 문화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것은 전통적인 군주제 사회에서 사람취급 받

지 못했던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상민들에게 대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관심과 배려였다고 생각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생명과 같이 중시되던 조상에 대한 제사 문제로 입교하지 못하는 사람들

까지도 기독교의 인권존중과 평등박애주의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기독교가 이 땅에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여성들의 활약은 눈부신바 있다. 그 숫자

는 적었지만 더 높은 수준의 기독교 문화가 조선 사회로 유입되던 시절의 얘기다.  

         그러나 요즘 한국 교회는 세속적인 사회 문화의 유입을 막아내는데 급급하고 있는 실정

이다. 그리고 그 노력들이 그리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 교회의 문화

의 수준이 전반적인 사회 문화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세속화 될수록 보다 정

결한 문화에 대한 갈급함이 더한 법이다. 불법이 판치는 세상일수록 정의로운 문화를 찾는 법이

다. 무정한 세태일수록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늘어나는 법이다. 한국교회 문화가

다시 수세에서 벗어나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그 수준을 높여야 한다.


         3) 문화와 공동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문화는 공동체라는 조직을 전제로 한다. 개인적 삶의 방식을 문화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문화는 근본적으로 공동체를 그 근거지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커뮤니케이션 없이

는 존재할 수 없다 (without communication, without community). 따라서 문화와 공동체 그리

고 커뮤니케이션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삼각편대인 셈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 문화의 문제점

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라는 공동체와 그 안에서 행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행태를 살펴

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라는 공동체의 특성을 단순히 정리하는 일은 불가능할 만큼 복잡한 일임에 틀

림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앞에서 논의한 유교적 전통과 연계된 부분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가부장적 전제정권의 통치를 위해 '제사권의 종손 독점'과 '재산 상속권의 종손 우대정

책'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였다는 점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다. 이 가운데 요즘 공동체로서의 한

국교회의 특성은 두 번째 전략, 즉 재정에 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에서 자본주의적 성향이 급격히 강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 교회의 바라는 바는 교회 성장이고, 대교회가 바람직한 모델로 자리 잡고 있는 현

실이 그 증거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도들이 원하는바 또한 축복 일변도인 교회가 많다. 여기

에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성장은 곧 양적 성장을 뜻하고 축복 또한 물질적 축복에 국

한 된다는 사실이다. ‘구름떼같이 몰려 든 부자들로 가득한 크고 화려한 교회당’이 꿈이 되어버

린 한국교회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공동체 (capitalistic community)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은 지극히 유교적이다(confucian communication). 장유유서의

전통이 살아 숨 쉬며 위계질서에 따라 발언권이 주어지고 목회자나 장로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

하는 일은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험이다. 궁핍한 자나 장애인의 한숨에

귀를 기울이는 일도 드물다. 회의는 서로 의견을 가진 성도들의 지혜를 모으는 자리라기보다는

당회의 결정사항을 통고받는 자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 밑바닥에는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

하지 못하는 배타적 이기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한국 기독교 문화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유교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자본주의적 공동체에서 기독교적 문화가 꽃피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

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의 창달을 위해선 기독교

적인 커뮤니케이션과 기독교적인 공동체 부흥이 우선되어야 한다.



              V. 글을 맺으며


         한국 기독교 문화는 그 토양의 부실함 까닭에 짧은 시간 내에 아름답게 꽃피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 문화 창달의 사명은 막중하다. 이제부터라도

 christian communicaton, christian community, 그리고 christian culture를 염두에 둔 장기

적이고도 포괄적인 전략수립이 시급하다. 반짝거리는 유형의 문화에만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문화란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 주위에 숨어있는 희망의 씨앗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터교회에서 시행중인 극빈자를 위한 부채탕감과 공과금 대납 운동은 한국교회에 스며든 천민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좋은 본보기다. 희년의 진정한 의미가 개인적 축복에 그치지 않고 인간적

정이 넘치는 공동체 부활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 현실에서 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구

체적인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대규모 학원가와 고시촌이 밀집한 지역, 노량진에 위치한 강남교회에서 학생들을 위해

새벽밥을 제공하여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는 소식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좋

은 예라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 성도들만을 생각하는 배타적 이기주의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도 우리 교계 곳곳에 잘 알려지지 않은 멋진 시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험들을 서로 나누고 더 많은 지혜가 모이기 위해선 남녀노소, 빈부귀천, 그리고

상하구분 없이 말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다. 성경은 “그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

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 (출 33: 11) 하셨다고 적고 있다. 또한 세미한 음성까지 들

으시는 하나님의 민감한 경청이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막힘없이 흐르는 물처럼 흐

르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때만 교회 문화는 곧 목사의 문화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이다. 


       Christian Culture - Christian Community - Christian Communication 

       Christian Culture - Capitalistic Community - Confucian Commun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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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창조적 소수
2010/11/03 11:38
제44차 “고흥성공아카데미” 개최
군민의식 함양에 크게 기여
2009년 08월 27일 (목) 20:59:49 강계주 기자 igj2668@hanmail.net
고흥군이 군민과 공무원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접하여 자기계발과 자치단체 경영의 선진화에 기여하기 위해 지난 2006년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실시해오고 있는 고흥성공아카데미가 선진군민의식을 제고하고 발전적 군정수행의 토대가 되고 있다.

   
열강을 하고 있는 박영근  대표

 군은 27일 오후2시부터 고흥문화회관에서 군민과 공직자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박영근(아담재 대표컨설턴트)씨를 강사로 초청하여 “말 통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주제로 「제44회 고흥성공아카데미」를 개최하였다. 

   
▲ 유모어와 특유의 제스쳐로 열강을 하고 있는 박영근 강사

박영근씨는 "사람들마다 생김새와 개성은 모두 다르지만 서로가 각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때 사회의 발전 또한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칭찬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강의에 앞서 박래복 부군수는 “나로호 발사가 목표 궤도의 진입에는 실패하였지만 우주궤도까지 도달하게 하는 기술적인 성과와 노하우를 쌓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우주강국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며 이를 위해 그동안 정진해온 과학자들을 격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말하고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신종 플루가 군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건강관리에 보다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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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창조적 소수
2010/11/03 11:35

 

평화의 리더 예수님은 세상의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한결같은 사랑을 선포하셨고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완성시키셨다. 이 시대 크리스천 리더,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심는 역할로 부름 받은 그들은 위기와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십의 원칙을 떠올린다고. 크리스천 리더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명장면, 그 리더십의 현장으로 따라가보자. 진행 편집부

제자들을 위해 생선을 굽던 예수님

아담재 대표 박영근

요한복음 21:4~14

요한복음 21장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만을 생각하며 실망했던 7명의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이들은 생업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몹시 지쳤고, 낙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빵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빵을 가져다가 나눠 주시고 생선도 주셨습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예수님은 인간이 따를 수 없을 만큼 넓은 도량을 가지신 분이시며 끝까지 제자들을 믿고 찾아가주시는 의리가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없는 은혜로 베푸시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넓고, 크고, 깊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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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창조적 소수